본문 바로가기

음식 정보

강적들-한국 라면의 역사와 전쟁 1부


짬뽕라면 전성시대

요즘 라면업계의 가장 핫 한 전쟁을 일으키코 있는 짱봉라면. 
오뚜기 '진짬뽕', 농심 '맛짬뽕', 팔도 '불짬뽕', 삼양 '갓짬뽕' 이 전쟁을 벌이고 있는 가운데 품절사태까지 이루어짐.
중국 관광객 에게도 짬뽕라면 사재기 열풍이 불고 있는 실정.




진짬뽕 출시이후 인기를 얻게 되자 다른 업계에서도 이어 짬뽕라면을 출시하기 시작.
현재 짬뽕라면의 강자는 오뚜기와 농심, 팔도와 삼양이 뒤처져 있는 형태.
삼양은 진열대 전쟁에서 밀린 상태.
특정회사의 제품이 진열대에서 볼 수 없다는 것은 인기가 없어서가 아니라 부족한 영업비용 때문.



오뚜기 '진짬뽕'은 출시 50일만에 천만개 판매. 3개월만에 4천 만 개가 팔림.
지난 11월 출시 한 농심의 '맛짬뽕'이 맹추격중.
출시 50일만에 2천만 봉 판매.

판매속도는 진짬뽕을 앞서고 있지만, 현재 매출은 진짬뽕이 우세한 상황.
라면의 절대강자 '신라면'을 제치고 대형마트 판매 1위에 오름.

마트에서 짬뽕라면을 더욱 맛있게 조리해 먹을수 있도록 짬뽕라면용 식재료 세트까지 팔고 있는 상황.
이 라면전쟁은 53년 역사동안 치열한 전쟁을 거쳐왔음.


한국 최초의 라면

1963년 출시된 '삼양라면' 이며, 삼양식품의 창업주 전중윤 회장이 남대문 시장에서 5원짜리 꿀꿀이죽을 먹는 사람들을 보고 안타까워 하던 중 일본의 라면이 떠오르게 되어 삼양라면을 만들게 됨. 

라면의 역사,삼양라면,농심,우지파동




먹고 사는 문제가 절박했던 당시에 식량문제를 해결한 일등공신 이었다.

라면의 역사,삼양라면,농심,우지파동



당시 전중윤 회장은 자금 조달을 위해 중앙정보부장이었던 김종필에게 도움을 요청하게 된다.
당시 권력의 실세였던 김종필에게 라면사업의 필요성 설득에 성공해 외화 5만 달러 조달에 성공한다.
1970년 유신시절 수출 최대 목표가 100억 달러였던 상황이니 5만 달러는 어마어마한 자금 이었다.




당시 5만달러는 기계 구입비로 쓰였고, 일본에서 구입했기 때문에 외화로 지불해야 하는 상황.
당시 외화는 정부에서 배급을 해줘야 하는 시절.

5만달러를 지원하는 것에 대해 당시 대통령 박정희는 그까짓 튀김국수 만드는 기계에 국가가 가진 달러를 쓴다는게 말이 되느냐 며 격노함.
하지만 라면의 맛을 보고 난 후에 국가가 적극적으로 라면사업을 지원.

라면의 역사,삼양라면,농심,우지파동



하지만 당시의 라면은 비쌌던 음식 이었음.

한 기사에 따르면 이름도 생소했던 라면, 라면을 사람들이 마치 비단'라' 에 솜'면' 이라고 생각해서 잘 팔리지 않았다고 함.


1965년부터 정부가 쌀 부족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혼,분식 장려정책을 시행.

이에 단돈 10원이면 간편한 식사 가능한 라면의 장점을 부각시킴.  


이때의 삼양라면은 닭육수를 사용해 면 자체에 스프가 들어가 있어서 끓이면 하얀 국물의 라면 이었다. 


라면의 역사,삼양라면,농심,우지파동



삼양라면의 공적

삼양라면 첫 출시 쌀 3800여석 대체효과.

뉴스핌,
1963년 부터 1980년까지의 판매실적에 한정시켜 계산한 쌀 대체총량은 1428만 7000여석이라는 엄청난 숫자로 이는 1980년 환율 710대 1로 환산할 때, 14억 달러 이상의 외화절감효과를 거둔 셈이다.

    



1980년대 초반 삼양라면은 시장점유율 80%로 독보적 1위의 위치에 이르게 된다.

이후 경쟁업체들이 생겨났지만 삼양라면이 독보적 위치였음.



라면의 역사,삼양라면,농심,우지파동



이후 후발주자 였던 농심은 기업명이 아니라 '농심라면' 이라는 상표명 이었다.



라면의 역사,삼양라면,농심,우지파동




농심라면의 시초

롯데그룹 창업주인 신격호의 넷째동생인 신춘호가 출시한 롯데라면이 시초.
당시의 롯데는 작은 회사였고, 1971년 출시된 '소고기라면'이 출시하자마자 대박을 침.
농심 시장점유율 19%대에서 22.7%로 급 상승.
초창기 라면은 닭육수가 기본 이었지만 소고기 육수를 사용해 새로운 라면이 탄생하게 된다.

사실 신격호 회장은 라면사업을 반대했었다고 함.
신춘호가 형의 반대를 무릅쓰고 라면사업을 강행, 더불에 스낵, 음료사업까지 진출하게 된다.
결국 격노한 신격호 회장이 초강수로 롯데그룹의 이름을 사용하지 못하게 함.
때문에 당시 큰 성공을 거둔 농심라면에서 착안해 농심그룹이 탄생.

독립후 농심은 승승장구하며 1982년 히트상품 너구리와 육개장 사발면을 출시.

라면의 역사,삼양라면,농심,우지파동



육개장 사발면은 국내 최초 사발형태의 용기면으로, 끓여먹지 않고 끓인물을 부어먹는 조리법으로 더욱 간편해짐.

너구리는 국내 최초 우동라면으로, 기존의 라면과는 다른 면빨로 라면영역을 확대하게 됨.


1983년 '안성탕면', 1984년 '짜파게티'를 잇달아 출시하고 1985년 국내 라면시장 점유율 1위를 달성하게 된다.

이후 1위자리를 지키기 위해 끊임없는 제품계발을 하게되고, 설문조사를 통해 한국인은 매운맛을 선호한다는 것을 알고 '신라면' 출시.




이 신라면을 만들기 위해 연구원들은 하루에 20번 넘게 매운 국물을 시식했다고 하며, 라면용 고추 품종 선별에 몰두 했다고 한다.

하지만 고춧가루로는 매운맛이 부족했었고, 결국 연구끝에 다진양념으로 맛을 내기에 이름.


연구진은 전국맛집을 돌며 다진양념 레시피를 확보하러 다님.

결국 이렇게 만들어진 신라면은 출시전 내부 시식회에서 강한 매운맛에 대한 거부감이 지배적 이었다고 함.

하지만 매운맛이 오히려 차별화 요소가 될 것 이라고 생각한 신춘호 회장이 반대에도 불구하고 제품출시를 강행.


당시 라면은 '쇠고기라면', '김치라면' 등 주재료 이름표기가 일반적 이었지만, 관행을 깨고 한음절의 이름과 파격적인 디자인을 강행한다.
매운라면의 본질 그대로롤 강조한 것. 이러한 아이디어가 신춘호 회장에게서 나왔다고 함.

또한 신라면은 당시 식품명으로는 등록이 불가했었으며, 당시 식품위생법상 식품 상품명은 한글만 가능했었다.
이에 농심에서는 한자문화권에서 한자를 외래어 취급하면 곤란하다고 반박, 결국 농심의 건의를 정부에서 받아들인다.


뉴데일리
신라면은 출시되자마자 가파를 매출 상승곡선을 그리기 시작했다. 출시 첫해 석 달 동안 30억 원에 육박하는 판매고를 시작으로 이듬해인 1987년에는 무려 180억 원을 상회하는 매출을 올리며 국내 라면시장의 대표주자로 뛰어 올랐다.  

 


라면의 역사,삼양라면,농심,우지파동



이후 농심은 신라면의 성공에 힘입어 1988년 서울올림픽 라면 공식공급업체로 선정되기에 이른다.

폴리뉴스에 따르면 1988년 11월 농심은 라면업체 최초로 1천만불 수출유공탑을 수상했다고 함.


88서울올림픽 당시 가장 인기있었던 라면은 신라면이 아닌 '육개장사발면' 이었으며,

2015.10.16일 한국일보에 따르면..

한국형 라면의 진가가 세계에 알려지게 된 계기는 88서울올림픽이다. 특히 컵라면은 간편함과 감칠맛을 내세워 외국인의 입맛도 사로잡았다. 당시 농심의 주력상품인 육개장 사발면의 경우 하루 23만개(약 7,000만 원)가 팔리는 기록을 세우기도 했다. 미국 NBC방송은 선수촌 매점에서 팔리는 컵라면을 두고 "미국의 햄버거에 필적하는 인스턴트 식품"이라 평했다.


이후 농심은 국민라면이라 불리우며 20년 넘게 라면 시장에서 1위를 유지하며 70%의 점유율을 기록하게 된다.

신라면의 국내외 시장 1년 매출은 7,000억 원, 1986년 ~2014년 누적판매량은 약 240억 개(지구를 108바퀴 돌 수 있는 양).


현재 세계 80여 개국으로 수출되고 있으며, 일본, 중국, 중동과 이슬람국가, 지구 최남단 칠레까지 진출.

싱가포르에서 특히 잘 팔리는 신라면은 공항에 신라면 박스가 도착하면 도난 사례가 많다고 한다.



삼양라면의 몰락

1989년 11월 4일 경향신문에 삼양라면의 면을 공업용 우지를 사용해 튀겼다는 보도가 나가면서 일대 파란이 일어남.

라면의 역사,삼양라면,농심,우지파동


라면의 역사,삼양라면,농심,우지파동


라면의 역사,삼양라면,농심,우지파동



이 '공업용'이라는 말이 사람들을 경악하게 만들게 됨.

'우지파동' 으로 인해 3개월 동안 제조라인 중지, 시중에 나온 모든 삼양라면(100억 원 가량) 폐기, 천여 명 직원 퇴사 등 최대의 위기를 맞이함.


이데일리

1989년 공업용 우지(쇠고기 기름)을 라면에 썼다는 투서가 날아들며 삼양라면은 부도덕한 기업으로 낙인찍혔다. 바로 유명한 '우지 파동' 이다. 조사결과 이는 누명으로 밝혀졌지만, 우지파동은 삼양라면에 뼈아팠다. 1위 라면에서 시장점유율이 6%까지 하락하기도 했다.


이때까지 삼양라면이 1위업계라고 알고 있으나 1989년 이전에 이미 라면계 1위는 농심 이었다고 한다.

당시 라면시장 점유율은 농심 2 : 삼양 1 정도.


큰 타격을 맞은 삼양은 1994년 1월 라면 판매를 재개 한다.

2~3년 안에 신라면을 따라잡으리라 호언장담 했지만, 이미 사람들은 매운맛에 길들여져 있었다.



우지파동의 진실

우지는 소의 지방조직으로부터 가열 용출 하여 제조한 지방으로 우지의 대부분은 미국에서 생산된다.
우지는 1등급에서 12등급으로 나뉘어 지며, 1등급 우지는 소 콩팥을 감싸고 있는 흰 지방으로 바로 먹어도 될 정도의 신선도 이다.
나머지 단계들은 소 월령과 지방 산패도에 따라 분류되며, 1~3등급 우지는 식용이 가능하다.

미국인들은 소의 고기만 먹고 내장이나 뼈를 버리기 때문에 우리가 먹는 사골이나 소꼬리는 미국에서는 모두 공업용으로 분류한다.
먹지 않는 부위를 공업용으로 구분했던 것뿐. 1~3등급은 미국에서도 식용 기름으로 사용한다.

우지파동은 이것을 한국이 그대로 수입하면서 벌어진 문제이다.
삼양에서 수입을 할때 미국에선 '공업용'으로 표기했을지라도 식용으로 수입했다면 문제가 일어나지 않았을수 있다.

하지만 공업용을 식용으로 용도변경 하려면 엄청난 검수단계가 발생하고, 세금도 훨씬 싸다.
이러한 편법 유통과정이 이러한 참사를 불러왔다는 의견.

따라서 이러한 사정을 제대로 꿰뚫고 제보한 투서라 보여진다.
당시 정확한 정보를 전달하고자 하는 기자나 검찰의 노력이 있었다면 이러한 사태까지는 가지 않았을것.

결국 한국을 떠들석하게 했던 사건은 7년만에 무죄판결을 받게됨..

일례로 쓰레기 만두라고 하여 수많은 만두업체를 망하게 한 사건도 알고보니 '무해만두' 로 2달만에 무죄판결.
당시 단무지를 만들고 남는 무청과 꼬리 부분을 만두소로 제조 했다고 하여 '쓰레기 만두' 라고 취급하고 수사까지 갔지만 결국 무혐의 처분.
이로 힌해 만두회사들 다 망하고, 자살사건 까지 일어남.





2부로 이어집니다..